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 다케유키 (문단 편집) == 평가 == 소 다케유키의 개인적인 인물됨은 그와 관련된 자료가 거의 없어 사실 정확히 평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얼마 없는 사료들을 조합해보면, 적어도 됨됨이가 나쁜 사람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결혼 전부터 있던 덕혜옹주의 [[정신병]] 증세가 출산 후 더 심해졌음에도 결혼생활을 유지하려고 애를 쓴 정황이 보인다. 아내를 동정했는지 <환상 속의 아내를 그리워하며>라는 장문의 시를 쓰기도 했다. 허나 조선 황족과의 결혼으로 상당한 [[지참금]]을 받아 부유한 생활을 누리다 [[신적강하]] 이후 재산을 몰수당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덕혜 옹주의 정신병원 입원 및 이혼이 일어났기 때문에,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해도 좋은 남편이라고 하기도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이 부분도 위의 정신병 관련 내용과 더불어 참작해볼 여지는 있다. [[신적강하]] 이후 집안 하인의 숫자가 수십 명에서 단 1명으로 감소했기 때문에 사실상 정신병자를 수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병자와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진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당장 [[전두엽 절제술]] 같은 막장스런 방법이 획기적인 치료법이랍시고 떠들어지던 시대에, 완치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현대에 와서도 아내가 미쳤다고 가정한다면 수발 들다 본인조차 피폐해져 이혼을 고려할 충분한 현실적 사유가 될 판국에, 정신병에 대한 병명조차 생소하던 당시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아내]]를 위해서 그래도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꾀한거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이다.[* 정신병이 아니라도 긴병에 효자없다는 말도 있고, 병든 자식을 돌보다가 가족 자체가 해체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육체적인 병에 비해 정신병이나 치매가 심각한 경우에는 환자와 제대로 된 소통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환자가 극렬히 치료를 거부하면서 가족들에게 가정폭력을 저지르거나 하는 일도 있기 때문에 부부는 물론이고 부모자식 간에도 관계가 파탄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충분히 입원치료가 가능한 2020년에도 23년간 조현병을 앓는 딸을 돌봐오다 결국 어머니가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https://www.chosun.com/national/2020/11/10/5M3CWZDVLBAUHFCMTY7TIQHLMY/|#]] 하물며 1930-40년대에 그래도 아내를 내치거나 숨겨두지 않고 이만큼이라도 했다는 것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 아예 없고서는 있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신적강하 이후 바로 이혼한 것도 아니었고 1955년에 가서야 합의 이혼을 했다.[* [[덕혜옹주]]는 의사 표현이 불가능했기에 오빠 [[영친왕]], 올케 [[이방자]] 여사가 후견인으로서 이혼 합의를 해주었다.] 물론 이혼하고 얼마 안 가서 재혼한 모습에 대해서는 각자 판단에 맡겨야겠지만 사실상 10년 가까이 별거 상태였던데다가,[* 이 별거도 사이가 나빠서 한 게 아니라 당시의 정신병의 치료 방식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혼 당시 자식이라고는 딸 마사에 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48세였던 소 다케유키가 재혼을 서두른 것은 쓰시마 종가의 당주로서 대를 잇기 위함도 어느 정도는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봉건적 관념이 강한 [[동북아시아]]에서는 막 부인과 이혼하거나 사별한 남성에게 재혼을 강요하는 일이 아직도 많다. 이런 낡은 관념이 여전히 지배적이던 1950년대인데다, 귀족 집안의 자제이기까지 한 소 다케유키는 그 압박을 더 심하게 받았을 터였다. 봉건적 관념이 상대적으로 덜한 [[서유럽]] 같으면 전근대부터 [[귀천상혼]]으로 당주직 계승권이 먼 방계로 넘어가는 일도 잦았던 만큼 먼 친척을 후계자로 삼으면 될 일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소 다케유키의 조국인 일본은 21세기 기준으로도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남북한과 중화권보다도 더욱 강하게 남아있는 나라다. 당장에 다케유키 자신부터 친가가 대가 끊겨서 그 대를 잇기 위해 성을 바꿨고, 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 가문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2차대전 이후 소리소문 없이 끊긴 가문들이 꽤 된다. 한편,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런 평도 남기지 않았으며, 평소에도 입에 일절 올리지 않아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에 대해 뭐라 했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증언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만년의 수필에서 "25년은 내 인생의 공백기였다"라고 짧게 언급했을 뿐이다. 당시 소 다케유키에게는 덕혜 옹주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꽤나 공허한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아내를 안타까워해서 시를 쓰기도 하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덕혜 옹주를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한번 찾아왔던 것도 생각해보면, 소 다케유키도 마음 한켠에는 덕혜옹주를 안고 사는 인생이었을 것이다. 어찌됐든 연을 맺었던 부부였으니까. 만약 정혜가 요절하지 않고 더 나아가 결혼하여 자식을 얻었다면 소 다케유키는 정혜에게 쓰시마 소 가문 당주직을 물려줬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정혜는 여성인 만큼, 남자에게 가문을 계승시키는 [[일본]]의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딸 정혜가 아니라 자신의 사위로 들어왔던 스즈키 노보루에게 당주직을 물려주는 식으로. 마침 노보루는 이미 장인인 소 다케유키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성씨를 소씨로 바꾸기도 했고. 하지만 정혜가 자살한 것이 거의 확실해졌고 손주도 없으니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현재 소 가문의 당주는 다케유키가 재혼하여 낳은 다츠히토이며, 스즈키 노보루와의 관계는 어느 시점에서 정리된 듯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